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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신박한 정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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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30 03:00 입력 2020.07.30 03: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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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밤에는 라디오를 틀어놓고 괜히 서랍을 열었다. 보이기만 하면 사 모으던 다양한 색의 사인펜, 한 번도 끝까지 쓴 적 없는 접착 메모지, 급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샀던 버스 카드, 립밤, 물티슈, 그것들의 영수증. 한숨을 쉬며 서랍 속을 들여다보다 물건들 사이로 수업 시간에 주고받았던 쪽지들을 발견하면 나는 정리를 하겠다는 결심을 잊고 그 작은 종이 쪼가리에 정신을 팔았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유인물 뒷면이나 스프링 노트를 쭉 찢어 나눈 쪽지 속 내용은 ‘양호실 갈/말?(동그라미를 치시오)’ ‘체육 강당 아니고 운동장’ ‘생리대 빌려줘’ 같은 사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간혹 맥락을 알 수 없는 긴 대화들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생일을 축하하며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한 마음들이어서 읽다 보면 곧잘 서글픈 기분이 들어 눈이 맵고 코가 시큰해졌다. 품고 있는 낭만 하나 없이 늘 푸석하기만 하던 내 마음은 어쩐지 정리와 청소를 결심하기만 하면 그렇게도 쉽게 녹아내린 것이다.

신애라와 박나래가 호스트인 tvN의 새 예능 <신박한 정리>는 정리가 필요한 연예인게스트의 집을 방문하여 문제점을 진단한 뒤, 컨설턴트의 도움을 받아 집의 동선과 가구를 재배치하고, 세간의 원래 용도를 찾아 최적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활환경을 정리해주는 프로그램이다. 과정은 크게 ‘버리기’와 ‘공간 재구성’으로 나뉘지만, <신박한 정리>는 방송 분량의 90%를 ‘버리기’에 할애하여 ‘정리란 잘 버리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버릴 물건을 담을 상자를 앞에 두고 물건 하나하나에 미련이 남은 의뢰인과 “가슴으로 간직하고 제발 버리세요!”라고 말하는 신애라의 설전이 몇 차례 지나가면 어느새 상자는 버려야 할 물건들로 가득해지고 공간 재구성 작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집 안 곳곳은 물론 의뢰인의 얼굴에도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버림’이란 행위의 철학적 가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나 곤도 마리에 신드롬을 통해 이미 대중적으로 가공되었고 <신박한 정리> 역시 미니멀리즘에 수렴하는 궤적을 따르고 있기에 그리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방송은 이런 ‘버림’의 중요성을 좀 더 실천에 가깝게 보여주기 위해 세 아이를 키우는 집, 실제 공간 자체가 협소한 집, 세 명의 룸메이트가 모여 사는 집, 반려동물을 여러 마리 키우는 집 등을 먼저 방문하여 일상 속에서 버림의 중도를 찾고, 게스트들의 감상을 적극적으로 유도해서 버림의 정신적인 영향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려 한다.

<신박한 정리>의 네 번째 의뢰인이었던 정주리는 세 아들의 물건으로 가득 어질러져 방의 경계와 용도를 잃어버린 집에서 첫째 아들이 그린 손바닥만 한 그림 하나도 버리기 아까워 울상을 짓는다. 그러나 설득 끝에 많은 것을 버린 후, 정리가 끝나고 완전히 달라진 집을 마주한 정주리는 집 안을 둘러보는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방송은 그가 버린 물건들과 함께 몇 년간 계속된 육아와 가사 노동의 고되고 외로운 시간을 겹쳐 보여주고 그 비워진 공간에 ‘이제 다시 같이 무대에 서자’라고 말해준 박나래의 뜨거운 독려를 채운다.

무언가를 버릴 만큼 공간도 살림도 갖추지 못했고, 여전히 책상 하나 정리하는 것이 어려운 나는 비워낸다는 일이 영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정주리의 개운한 얼굴을 보니 뭐라도 좀 버려서 홀가분함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냥 머릿속이나 정리하자고 결심했다. 반드시 버려야 할 생각. 파맛 시리얼에 대한 계속되는 호기심, 한화 이글스의 이번 시즌 전망, 들을 가치도 없는 숱한 가해의 말들. 절대 버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 종합검진 받기, 고양이 사료 주문, 냉이 파스타 레시피, 누군가의 어려운 용기에 대한 끈질긴 믿음. 내 서랍은 여전히 복잡해도 내 머리만은 산뜻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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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30,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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