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래 알고 지낸 교수님이 내가 일하는 단체에 관해 틀린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럴 분이 아닌데…’ 하면서도 신뢰에 서서히 금이 갈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민망하게 여기며 사과했다. 틀린 정보를 알린 상대에게도 사실관계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다. 정중히 전한 진심에 서운하고 화난 감정이 스르륵 사라졌다. 한참 후배인 내게 거듭 사과하는 그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가 여전히 내가 신뢰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게 돼 다행이었다.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정확하게 사과하고, 돌이킬 줄 아는 어른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게 얼마나 안심이 되는 일인지 그때 알았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으로 세상이 소란하다. 그를 지지하던 이들이 느낄 황망한 슬픔을 섣불리 판단할 생각이 없다. 용기를 낸 피해자와 연대하고자 하는 나에게도 그 죽음은 비극이다. 비록 어긋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애도를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여러 의미로 내게 상실감을 안겼다. 첫 번째 상실은 ‘그럴 분’이 아니라 여겼던 이를 향한 신뢰의 상실이다. 어느 철학자가 말한 ‘인간의 복잡성’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간은 지극히 모순된 존재라는 걸 확인하며 한때 지지했던 이를 떠나보내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두 번째 상실은 안희정 전 지사와 오거돈 전 시장에 이어 세 번째 권력자의 성범죄 사실과 의혹이 드러날 정도로 구조적인 문제를 ‘사적인 일’쯤으로 여기는 한가롭고 뻔뻔한 권력자들을 향한 기대의 상실이다. 세 번째 상실은 자신의 ‘팬티’조차 스스로 빨지 않은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해맑은 무지와 적의를 드러내는 동료 시민을 향한 애정의 상실이다.
그렇기에 질문하게 된다. 박원순 시장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상실의 고통과 인간의 예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왜 피해자의 호소와 그에 연대하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겠다는 이들의 요청에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들의 고통은 부정하는가. 특정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성 관련 사건이 이렇게 드러나고 있는데 아예 ‘사회재난’으로 선포하고 대책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세상이 이렇게 총체적으로 망가지도록 침묵과 동조한 걸 부끄러워하고, 사과하고, 그게 미안해서라도 지금이라도 바로잡는 일에 기여하는 건 불가능한가.
그동안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해 차마 말하지 못했고, 싸우기 싫어 외면했고, 무지해서 넘어갔던 일들을 ‘그것은 성희롱입니다’ ‘성희롱은 죄입니다’라는 정확한 언어로 알려주는 이들이 있다. 피해 사실을 알린 이를 홀로 두지 않고 곁을 지키며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있다. 이들과 동시대인이어서 고맙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대가 저무는 걸 목격하며 이 시대의 충격적 종말을 애도하고 있다. 물론 새로운 시대가 쉽게 올 리 없다. 그러나 시간은 흐를 테고, 환멸에 지지 않고 분투하는 이들이 있는 한 늦게라도 도착할 것이다. 누군가는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하는 저의를 의심하지만, 그 새로운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겠다고 많은 이들이 ‘이제라도’ 말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아는 이들이라면, 살아서 분투하는 이들을 향해 예의를 갖춰 귀를 기울이고, 부끄러워하고, 팬티는 스스로 빨 줄 아는 ‘어른’이 되자.
July 18,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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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어른’이 필요한 때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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