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촛불혁명을 거친 민주주의 시대에 ‘독재’ ‘반민주’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쓰이고 있다. 마치 독재시대로 회귀해 사는 것은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정권 비판에 단골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야당 국회의원이나 보수 논객은 그렇다 치고 반정부 투사 이미지로 단숨에 대선후보 반열에 오른 검찰총장의 언사에도 등장하고 있다. “친문독재” “민주주의는 죽었다” “독재정당”이라고 적힌 손팻말이 국회의사당 한쪽을 가득 메웠다. 야당의 백드롭(배경 현수막)도 예외는 아니다. 집권 여당이 공수처법 개정안에 이어 공정경제 3법을 밀어붙이자 국민의힘은 ‘거대 여당의 입법독재, 국정농단이 일상화’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독재로 흥한 자 독재로 망한다’라고도 비판했다. 이에 발끈한 민주당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을 ‘평생 독재의 꿀을 빨던 세력’으로 몰아세우면서 때아닌 독재 논쟁이 격화되었다.
독재와 반민주.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 상황에 대한 적확한 진단일까. 의회 독재이고 입법 독재인가. 4·15총선에서 국민의 압도적 선택을 받은 다수당으로써 의회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것 아닌가. 독재정치란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민주적 절차를 부정하고 통치자의 독단으로 하는 정치다. 독일의 나치즘,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박정희의 유신정권과 전두환의 군사독재가 대표적인 예로 떠오른다.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자. 헌법이 힘없이 무너져 헌정질서와 삼권분립은 파괴되고, 시민의 정치적 자유는 눈곱만큼도 허락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생존권마저도 위협받는 때였다.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대통령 1인으로부터 나오는 시대였다. 제왕적 대통령의 절대 권력이 다스리던 억압과 공포의 시대를 우리는 독재라 부른다. 넓게 본다면 언론·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제약하고 헌법에 보장된 노동자의 기본권조차도 짓밟았던 이명박·박근혜 정권도 독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권력이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데 오남용한 시대도 독재이자 반민주다. 그러니 당명을 세탁했건만, 그 정치세력과 맥이 닿아있는 국민의힘이 현 정부를 독재로 몰아붙이는 단순 무지한 인식에 놀랄 뿐이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와 압도적 표심으로 다수당이 된 민주당을 독재와 반민주로 낙인찍으려는 국민의힘은 역사의식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몸에 밴 경험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국민이 진정한 나라의 주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독재시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선거에서 다수결 원칙에 따라 의회가 구성되고 그 입법 지형에서 절대 다수당이 지배하는 것은 입법 독재가 아니다.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국회가 작동하는 것이 의회 독재도 아니다. 물론 총선에 나타난 유권자의 표심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할 수 있지만, 개혁입법에 관한 한 여전히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니 유권자가 명한 입법적 독주이지 결코 독재라 칭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기관 개혁과 경제민주화의 진전이라는 유권자의 표심에 부응하여 의석에 걸맞은 권한과 책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대재해기업처벌법과 같이 유권자와 약속한 입법 처리에 주저하고 후퇴한 법안을 내는 것이 집권당의 횡포다. 언론과 시민의 말문은 막지 않았고 비판과 비난 등 할 말을 다 하면서 산다. 그런 세상을 독재라 칭하니 말문이 막힌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해온 진보 개혁 세력에 독재라는 지적은 뼈아프지만, 야당의 진단은 빗나간 화살이다. 내쳤어야 할 극우 보수세력까지 손잡는 독재몰이는 외연 넓히기에 실패할 전략이다. 야당의 잘못된 진단도 진단이지만 이게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된다. 공수처법이 통과되자 “유신정우회가 있던 시절 국회에서도 엄두를 못 냈던 법치주의 말살 행태” “4년 전 대통령 탄핵 때보다 더 불행한 날”이라는 논평을 쏟아냈는데, 유신독재와 박근혜의 국정농단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역효과만 날 뿐이다. 비교를 통해 현 정권을 비난하면 할수록 오히려 뼈아픈 과거의 기억을 환기하는 부작용만 커진다. 상대에게 퍼붓는 독재, 국정농단 등등 언사가 자신들의 구태만 회상케 한다. 원죄를 자백하는 헛발질이자 자살골이다. 국민의힘이 지금 상황에서 ‘이게 나라냐’라고 외친다면 어떨까. 공감은커녕 비호감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고 되살아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그들의 짐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야당의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말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힘을 불어넣어 줄 때도 있지만 때로는 짐이 될 때도 있다.
December 15,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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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훈의 법과 사회]말이 짐이 될 때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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