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고용보험, 그린벨트, 그린뉴딜정책은 어떻게 될까
고 박원순 서울시장 영결식이 7월 13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열린 가운데 고인의 영정과 위패가 추모공원으로 향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박원순 자살.”
지난주 마감 직후인 7월 9일 한 정치권 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짧은 한마디 전언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럴 리가. 포털뉴스를 검색해보니 속보로 박원순 서울시장 실종을 알리는 뉴스가 막 나온 시점이었다.
곧바로 고한석 서울시 비서실장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다. 텔레그램에 남겨진 시간 기록을 보니 첫 메시지를 보낸 것은 오후 6시 14분. 고 비서실장은 한동안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기자가 연락한 다른 서울시 고위관계자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끊었다. 직감했다. ‘뭔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그 뒤 사방에서 정보와 추측이 쏟아졌다. 모든 정보는 하나의 불길한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장을 가늠할 수 없었다.
“유구무언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시신이 수습되고 하루가 지난 뒤 통화한 서울시 고위관계자의 말이다. 서울시의 고위 정무라인 인사들은 시장과 운명을 같이한다. 지방별정직 공무원 인사규정은 임용 당시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사임·퇴직 등 자격을 잃거나 임기가 만료되면 함께 면직된다.
이 관계자의 말이다. “7월 10일 자정을 기점으로 나도 자동면직된 셈이다. 짐 정리하려면 한 번 가긴 가야 하는데….”
그는 논란이 되었던 성추행 고소와 박 시장 실종 당일까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그 후도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 일부러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고한석 실장은 <경향신문>에 “고소인이 경찰에 고발한 당일(7월 8일) 오전까지도 피고소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피해자의 고발 한 시간 전쯤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는 여러 경로를 통해 박 시장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첩보’를 들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박 시장을 찾아가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임 특보가 이날 박 시장에게 전한 내용은 ‘4월 중순 비서실 직원 성추행 사건에 대한 서울시의 미흡한 대응’ 문제로 뭉뚱그려져 있었다.
■ 4월 서울시 핵심 비서진 교체 이유는
고한석 서울시 비서실장(가운데)이 7월 10일 실종 신고 7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시신인 안치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유언장을 공개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지난 5월 초 기자는 총선에 즈음해 ‘소리소문없이’ 진행된 박원순 서울시의 비서진 교체에 대한 기사를 썼다. 정당 소속 지자체장이 총선 기간 중 할 수 있는 역할은 없지만, 왜 하필이면 그때 비서진을 교체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기사의 출발점이었다. 비서실장 교체는 오르지 않는 지지율에 대한 문책성 인사였을까(오성규 전 비서실장은 그때부터 현재까지 기자의 연락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그는 “자신이 근무한 시기가 3월까지였다”고 주변에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한석 비서실장을 비롯해 주요 고위 비서진들의 임명일은 4월 27일이다. 인수인계 기간으로 중첩된 시기를 고려하더라도 간격이 너무 벌어진다.
고 실장이나 최병천 민생정책보좌관, 박도은 대외협력 보좌관 등의 임용이 던지는 메시지는 뚜렷했다. ‘대선용 인사’다.
기사를 준비하면서 새로 발탁된 정무직 인사들을 서울시청 6층 사무실에서 만났다. 기자를 만난 앞선 고위인사가 꺼낸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전국민고용보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박원순 시장이 전국민고용보험을 자신의 의제로 꺼내기 전이었다. 새로 발탁된 인사들을 대선 프로젝트의 시작으로 본 까닭은 이들이 박원순 시장과 종전에 박 시장을 구심점으로 모여 있던 시민사회계 사람들이 아니라 당료·정치권 출신 등 다소 이질적인 흐름 속에 놓인 인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을 시민사회적 문법과 일하는 방식에 익숙한 종전 측근과 이들 민주당 출신 인사들의 ‘화학적 결합’은 쉽지 않을 것으로 봤다.
이날 만난 자리에서 서울시 고위인사가 꺼내놓은 ‘전국민고용보험’ 의제는 일부러 피했다. 당시 기사에서 담아낼 주제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난 다음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전국민고용보험’을 제기하는 배경 등을 들었다. 그냥 새로운 의제 제기가 아니다. 소위 진영 내의 종전 인식, ‘무상’과 ‘보편복지’는 좋은 것이고, ‘선별복지’는 나쁜 것이라는 패러다임에 대한 공격이었다. 더 나아가 대권 2위 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선도하고 있는 기본소득론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 재선·3선 거치며 달라진 박 시장
7월 12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시장 시민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 김창길 기자
박 시장이 이 의제를 전면으로 꺼내든 시점은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고 실장을 비롯한 핵심 정무직 인사들은 전국민고용보험을 주제로 한 박 시장의 언론인터뷰를 SNS나 메신저에 알렸다.
대선 의제화가 목표인 듯했다. 그러나 생경했다. 박 시장의 여러 인터뷰를 읽어봐도 쟁점 사안은 파악하고 있되, 그의 언어는 아니었다.
“대선 의제를 두고 논쟁이 된 것을 환영한다”면서도 논쟁은 결국 기존의 기본소득 논의를 공격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지난 6월 초, 기본소득과 전국민고용보험에 대한 논의 갈래를 정리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과열된 논란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민주당 핵심지도부의 의견이 고 실장을 통해 박 시장에게 전달되었다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고 실장에게 연락했다. 기자가 연락한 당일 고 실장은 “오늘부터 호흡조절을 하는 것으로 아침 보좌진 회의에서 논의됐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날 점심 무렵 박원순 시장은 다시 개인 페이스북에 인터넷에서 유명한 평등과 공평을 다룬 그림을 올리면서 기본소득론을 공격했다. 결과론적으로 사후적인 평가지만 최근 박 시장의 행보는 무척 조급했던 걸로 보인다.
왜 그랬을까.
이슈를 제기해도 오르지 않는 대선주자 선호도 때문? 주요 여론조사에서 박 시장의 대선주자 지지율은 3%를 넘은 적이 없다. 오히려 오차범위 내이지만 미세한 수준에서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 5월 서울시청에서 만난 신임고위직 인사는 “결국 승부를 보는 것은 정책”이라며 “당장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다고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2년 가까이 남은 대선까지의 시간은 정치적으로 긴 시간이며, 지지율은 차츰 쌓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2011년 재보궐 선거로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 기자는 박원순 시장을 세 차례 인터뷰했다. 이번 기사를 준비하며 기사와 별도로 정리해뒀던 인터뷰 질의응답 전문을 검토했다.
확실히 초선 때 인터뷰 때와 2017년 했던 마지막 인터뷰에서 박 시장이 보여준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마지막 인터뷰에서 다년간의 시정 경험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지만 모종의 초조함도 엿보였다.
기자는 박 시장 인터뷰 말미에 금융계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인 자리에서 들었던 ‘대권주자 박원순은 왜 지지율이 오르지 않는가’에 대한 풀이를 전했다. 인터넷에서 자신에 붙은 비하적인 별명보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평가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박 시장의 빈소가 차려진 7월 10일 참여연대 시절 간사로 일한 한 인사는 “3선에 나서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가 달성한 최장수 서울시장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힘들겠지만 재선에서 멈추고 차기를 준비했다면 오늘과 같은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라고 한탄했다. 2011년 10월 27일부터 그가 사망한 2020년 7월 10일까지 재임 기간을 날짜로 환산하면 3180일이다.
그러나 박 시장의 비극적 마지막은 그 자신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확실해 보인다.
7월 13일 서울 은평구 녹번동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박원순 전 시장은 여성인권에 관심을 갖고 역할을 해온 사회적 리더였음에도 그 또한 직장 내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적 대상화, 성희롱, 성추행을 가했다”며 “서울대 교수 성희롱 사건 이후 성희롱 예방이 법제화되었고, 그 또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직장 내 성폭력 예방교육을 성실히 이수해온 듯했지만, 본인 스스로 가해행위를 성찰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대독한 글에서 피해자는 자신이 원한 것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것”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한마디로 ‘박원순마저’란 것이 아닌가.” 최근 기자와 통화한 최측근 인사의 한탄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성희롱 문제를 최초로 알린 박원순 시장이 가해 당사자로 밝혀진 것이 ‘지독한 아이러니’라는 것이 이 인사의 얘기다.
■ “이제는 피해자의 목소리 들어야 할 때”
7월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냈다는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7월 15일 박 시장이 떠나고 없는 마당에 그린벨트 해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박 시장은 지난 7월 6일 민선 7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그린벨트는 서울시의 기본철학에 해당한다”며 “그린벨트는 미래세대를 위해 남겨놔야 할 보물과 같은 곳”이라고 밝힌 바 있다. 생전 박 시장이 마지막으로 밝힌 의제는 ‘서울형 그린뉴딜’이었다. 사실상 박 시장의 대권 의제였던 전국민고용보험제 등과 함께 이들 ‘박원순표 정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앞서 통화한 전 서울시 핵심 고위인사는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가 제기한 정책의제는 국회의원들 법안 발의를 통해 실현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입법시스템에 올라와 있는 고용보험제 개정안 법안 발의를 보면 박원순계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안이 눈에 띈다. 그러나 7월 15일 통화에서 의원실 관계자는 “우리가 낸 안은 박 시장이 주장하던 전국민고용보험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실업수당 보완안”이라며 “의원이 박 시장의 유지가 반영된 전국민고용보험제 관련 입법을 주도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박 시장의 안과 가장 비슷한 주장으로 입법공청회를 연 쪽은 당적이 다른 심상정 의원실이 유일하다. 박 시장의 죽음 이후 친여 성향 인터넷 게시판에서 조용한 지지를 받은 것은 ‘이제는 우리가 진실과 마주할 시간’이라는 주진오 역사박물관장의 글이다. 그는 “애도의 시간을 마치고 피해 호소인의 목소리를 들어볼 차례다. 고인을 사랑하고 추모하는 분일수록 더 힘들겠지만, 함께 견뎌내야 할 시간이다”라고 적었다.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세상을 떠난 이상, 완벽한 진실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마주 봐야 하는 것은 박원순이 남긴 유산이 아니다. 진보나 보수, 여당 혹은 야당의 진영 이익을 떠나 박원순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차분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피해자의 목소리다. 그게 비록 고통스럽고 힘든 일일지라도.
July 18, 2020 at 08:41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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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0일 재임 서울시장 박원순이 남긴 것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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