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이영경의 Stage]이제부턴 피해자의 시간[플랫] - 경향신문

was-trend-was.blogspot.com

강화길의 단편소설 ‘음복’엔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가 등장한다. 베트남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시아버지, 그의 수발을 들며 고생한 시어머니, 성차별을 당했던 시사촌…. 결혼 후 처음으로 참석한 시가의 제사에서 주인공은 단시간에 복잡한 갈등 구도를 간파하지만,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

“무지도 권력이다”라는 말이 작동하는 방식을 소설은 서늘하게 그린다. 남편의 맑은 얼굴은 그늘에 잠식당한 다수의 희생 덕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무지한 상태로 괜찮을 수 있을까? 권력자의 ‘무지’는 무해할 수 없다. ‘무지’가 권력의 형태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때, 차별과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안희정, 오거돈, 그리고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고 박원순 시장은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부하 직원에게 행한 행위가 ‘범죄’가 될 수 있다고는. 그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을 고발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지자체장으로 누렸던 ‘제왕적 권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무지’다. 묵인과 침묵으로 유지되는 ‘무지’는 진실이 발화되는 순간 깨진다. 무지가 권력이 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끝났다.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혁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KSVRC) 트위터 계정(@stoprape)

13일 오후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혁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렸다. 출처|한국성폭력상담소(KSVRC) 트위터 계정(@stoprape)

박원순 시장의 영결식이 끝났다. 57만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특별시장 5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은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어 수많은 시민들이 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였던 그의 삶이 재조명되고 추모됐다. ‘애도’는 충분했다.

‘애도’는 침묵을 요구했다. 여당 대표는 성추행 의혹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예의가 아니다”라고 호통쳤다. “4년 동안 지속된 성폭력”에 시달리다 어렵게 고소를 하고 나선 피해자의 목소리는 지워졌다. 모두가 충격과 혼란에 빠져 있었을 때, 그가 느낀 공포와 고통은 어땠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주디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말한다. “공적인 애도가 역사적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공적 논쟁과 비판적 담론을 잠재우는 계기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 어떤 형태의 슬픔은 국가적으로 인정받고 확장되는 반면에 다른 상실은 사유 불가능하고 애도 불가능하게 되는지를 생각해본다.”

미국의 9·11 테러 이후 쓰인 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어떤 ‘상실’은 공적 애도의 대상이 되지만, 어떤 개인이 겪은 폭력은 ‘묵살’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고인의 폭력이 ‘공소권 없음’으로 손쉽게 삭제되어 버린다면, 수년간 지속된 고통 끝에 ‘살기 위해’ 고소를 택한 피해자의 삶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는 것일까. 피해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일상과 안전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고통과 침묵 속에 박제되어 버린 피해자의 시간을 이제 다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상실에 대한 우리의 취약성과 그에 따르는 애도라는 과제, 이런 조건 속에서 공동체를 세울 기반을 찾는 일, 이것 모두와 관련된 차원의 정치적 삶을 고찰해볼 것을 제안한다.”

고인은 영면에 들었지만 그의 죽음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거대한 질문과 숙제를 던졌다. 고위 공직자의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반복되는 사회구조적 문제점을 찾아내고 응당한 책임을 묻고, 뜯어고쳐야 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애도다.

[이영경의 Stage]이제부턴 피해자의 시간[플랫]


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Let's block ads! (Why?)




July 14, 2020 at 08:15AM
https://ift.tt/32j8pX5

[이영경의 Stage]이제부턴 피해자의 시간[플랫] - 경향신문

https://ift.tt/2Yts9ni


Bagikan Berita Ini

Related Posts :

0 Response to "[이영경의 Stage]이제부턴 피해자의 시간[플랫] - 경향신문"

Post a Comment

Powered by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