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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플랫]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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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이 시작됐다. 땀은 흐르고, 몸은 끈적이고,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해야 좀 살 것 같은 계절이다.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름이면 유난히 마찰을 빚는 집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벗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더움을 호소하는 자와 예의를 수호하는 자 간의 다툼이다. 딸만 있는 집이라고 모든 여자들이 다 벗고 다닌다는 경우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지만 아들만 있는 집에서 엄마 빼고 모두가 속옷 바람으로 다닌다거나, 샤워를 마친 뒤 아무렇지 않게 맨몸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는 종종 듣는다.

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야 집 안에서 어떤 차림이건 상관이 없겠다. 하지만 1인 가구가 아니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내 집이니까 편하게 내 맘대로 입겠다는 마음도 알겠다만 우리에겐 분명 다른 사람의 몸을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몸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할 때는 내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사적인 몸으로부터 적절한 사회적 거리를 보장받을 권리까지를 포함해야 한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areumlee@khan.kr

그래픽 | 이아름 기자 areumlee@khan.kr

캐나다 앨버타주의 보건당국이 제시하는 ‘개인적인 몸(My private body)’ 성교육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람의 몸 그림을 보며 사회적인(public) 신체부위와 개인적인(private) 부위를 구분해본다. 화장하기, 면도하기, 식사하기, 전화하기 등도 마찬가지로 개인적 활동과 사회적 활동으로 구분해본다.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와 예시를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거실, 침실, 학교 운동장, 교실, 화장실과 같은 다양한 장소를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으로 분류해보고 각 장소에서 가능한 활동과 신체접촉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이야기해본다. 이런 교육을 통해 내 몸과 사생활을 지키는 법은 물론 스스로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낼 때 지켜야 할 거리감에 대해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공적 공간에서 갖춰야 할 몸에 대한 태도를 성교육에서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 결과로 온라인에는 ‘공원에서 혼자 성욕을 해결했을 뿐인데 범죄자로 기소되다니 답답하고 억울하다’는 유의 하소연이 넘쳐난다. 경찰학과 교수이자 프로파일러인 사람이 친구들과 과학실에서 함께 자위했던 일을 학창 시절의 추억처럼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소개했다. 모두 사회적 공간에 대한 감각,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것, 혹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다.

구성원 간의 사회적 관계가 오고가는 장, 혹은 나의 몸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곳을 공적 공간이라고 할 때, 욕실 문 앞이나 거실은 명백히 가족 간의 사회적·공적 공간이다. 그러니 가족끼리라도 선을 지키는 매너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난히 선을 뭉개는 경향이 있다. ‘가족이니까 맨몸이어도 되고 가족이니까 민망하지 않다’는 틀렸다. 가족이야말로 사회화를 경험하는 기본단위이자, 성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그러니 제발 옷을 입자. 샤워 가운이라는 훌륭한 대안도 있다. 가해방지 성교육은 타인의 권리와 경계를 존중하는 생활태도를 익히는 것에서 시작된다.


김민지 풀뿌리 여성주의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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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7, 2020 at 12:57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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