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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넘는 콘텐츠, 문제는 번역이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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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9 14:33 입력 2020.08.09 16:3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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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일러스트 김상민

콘텐츠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대에도 한 가지 장벽은 있다. 각 나라와 지역의 문화가 담긴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다. 지난 7월 20일 일본 넷플릭스는 한국 영화 <택시운전사>를 설명하는 소개 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暴動)’으로 표현해 논란이 일었다. 앞서 4월에는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인 반향을 얻은 드라마 <킹덤>을 대만에 방영하면서 현지화된 제목을 붙이는 과정에서 <이시조선(李屍朝鮮)>으로 이름 붙인 일이 알려지기도 했다. 역시 넷플릭스로 공개된 영화 <사냥의 시간>도 독일어 번역 자막 등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사실이 알려져 비판을 받았다.

전 세계의 주목받는 영상 콘텐츠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경로가 넷플릭스이다 보니 이들 사례가 많이 알려졌지만 다른 영상 플랫폼이라고 번역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경우도 많다. 일단 넷플릭스는 <택시운전사> 작품 설명 문구에 들어간 ‘폭동으로 지옥이 된 거리’와 같은 표현을 수정해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로 대체했다. ‘이씨조선’에 좀비를 뜻하는 ‘주검 시(屍)’ 자를 집어넣은 <킹덤> 대만판 제목도 ‘이씨조선’이란 용어가 일제강점기 이후 주로 일본에서 조선왕조를 격하하는 의미로 쓰였다는 비판이 일자 <시전조선>으로 바뀌었다. <사냥의 시간>에 나온 ‘일본해’ 표기도 사라졌다.

하지만 국내로 들어오는 콘텐츠든 해외로 진출하는 콘텐츠든 번역과 오역을 둘러싼 논란과 그에 따른 고민은 끊이지 않고 있다. 영상을 비롯해 K팝을 비롯한 대중가요, 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서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지만 단시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콘텐츠 안에 포함된 역사적 맥락이나 특별한 감성을 잘 짚어내 번역하면 전파력도 배가되지만, 반대로 오역을 방치하면 제맛을 살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왜곡된 인식을 유포할 우려도 높다.

잘된 번역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원어 콘텐츠의 복합적인 의미를 적절하게 전할 수 있다. 짧게 지나가는 영상 자막에는 이런 내용을 모두 담기 어렵다. 하지만 팬들이 손수 찾아서 보는 콘텐츠는 다르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배경지식까지 모두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긴 부연설명이 달려도 기꺼이 읽는다. 팬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어로 된 표현을 외국어로 바꾸는 데 나서기로는 ‘방탄소년단(BTS)’을 넘어서는 팬덤이 없다. 가사 한두 줄에 대한 설명이 1000자를 쉽게 넘어간다.

BTS 멤버들이 각자의 고향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는 가사의 ‘마 시티(Ma City)’는 국내 각 지역에 대한 다양한 배경지식을 알아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곡이다. 예를 들면 “나 전라남도 광주 Baby/나 KIA 넣고 시동 걸어 미친 듯이/모두다 눌러라 062-518” 같은 가사는 광주광역시를 연고로 한 KIA 야구단이나 지역번호 ‘062’,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518’이란 숫자를 모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팬들은 이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외국어로 하나하나 풀어서 번역과 함께 올린다. 트위터에서 BTS 번역계정을 찾으면 이와 관련된 글들이 길게 이어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전업 번역가가 아니지만 전업 수준에 가까운 세밀한 번역을 내놓는 마니아들이나 넷플릭스 등의 플랫폼에서 번역 수요가 늘면서 부업 삼아 번역에 도전하는 일반 시민이 늘어나는 것도 문화 콘텐츠의 세계화를 반영하는 모습이다. 해외의 영화나 드라마 등을 번역해 수입하면서 오역 논란이 벌어지고 나면 문제가 되는 대목을 수정한 자막이 바로 올라오는 것도 이들의 힘이다. 번역 전문 민간 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한 뒤 영상번역을 부업으로 삼은 직장인 권모씨(34)는 퇴근 후 30분 이내 분량의 단편 콘텐츠를 주로 번역한다. 이전에도 외국 영화·드라마 번역 자막을 스스로 만들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일할 수 있다.

권씨가 말하는 고충은 역시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분야의 용어나 표현을 한국어로 바꾸는 데 있다. 전문 번역가들도 가장 많이 고심하는 대목이다. 권씨는 “드라마나 다큐 중에서 특정 집단, 예를 들면 공대생이나 예술가 같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옮기려면 막힐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넷플릭스를 비롯해 디즈니 등 온라인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의 확장 속도가 빨라 일감은 떨어지지 않고 나온다.

유튜브처럼 일부 콘텐츠에 대해 자동번역을 거친 자막 서비스를 지원하는 플랫폼에서는 영상에 출연하는 인물의 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전혀 엉뚱한 자막을 송출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가령 국군 합참의장 취임식 장면을 보도하는 뉴스 장면에 나온 “받들어 총”이란 구호는 “빨아줘요 쪽”이란 민망한 표현으로 바뀌어 자막으로 나온다. 아직 자동번역 기술이 수요에 걸맞을 정도로 수준을 높이지 못한 점은 직접 번역에 나서는 번역가들의 몸값을 높이는 배경이기도 하다. 자신이 전문 번역가로도 활동하는 한 영상번역 전문업체의 대표는 “업체들이 우후죽순 세워지면서 인공지능보다는 낫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그리 믿을 만하지 않은 번역도 난무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사실 나 자신도 시간에 쫓겨 번역을 마치고 나서 나중에 오역을 발견한 경우가 많은데, 업계에 이름난 번역가들 대부분 그런 경험이 허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번역에 줄곧 힘을 써왔지만 여전히 콘텐츠 해외 진출에 번역이 걸림돌로 남아 있는 분야도 있다. 문학이 대표적이다.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번역의 벽이 공고한 탓이다. 2016년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가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한 이후 오역 논란에 휩싸인 경우가 대표적이다. 한국어에서 흔히 주어가 생략되는 점을 잘 파악하지 못해 영역본으로 책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작가는 당시 인터뷰에서 “역자의 한국어가 아직 서툴다는 것을 느꼈지만 영어 표현이 좋아서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지만 결국 문제가 된 오역 부분 약 60곳을 수정해 찍겠다고 밝힌 바 있다.

문학 번역의 문제는 한국어와 외국어를 동시에 잘하는 원어민 번역가가 부족한 데 뿌리를 두고 있다. 영어권 안에도 미국·영국·호주 등 문화적 배경이 다르고 그 밖의 문화권에는 일본이나 중국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어와 외국어의 특성을 함께 간파할 수 있는 인력 자체가 희소하다. 특히 문학적 소양을 갖추기까지 하려면 오랜 훈련 기간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서로 다른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능력을 높이려는 태도가 갖춰져야 올바른 번역과 오역을 가르는 ‘한 끗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번역 전문가인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저서 <번역의 미로>에서 “오역은 분명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를 오역으로, 어디까지를 해석의 영역에 맡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면서 “번역과 ‘반역’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며 객관적인 평가나 판단이 아니라 주관적인 평가와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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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09, 2020 at 12:33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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