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세계엔 코로나19가 오지 않아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고 활동하고, 사람들과 침 튀기며 싸우다 부둥켜안고 엉엉 울기도 한다. 10개월간 몸에 밴 습관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몰입을 막으며 ‘저러다 다 죽는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모래밭.’ 드라마 <스타트업>의 배경이 되는 ‘샌드박스’는 젊은 창업자들이 실패해도 계속 도전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이상적인 기업이다. 주인공들은 그 모래밭 위에서 사랑을 하고, 쓰러져 울부짖고, 치열하게 싸우며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마스크를 쓰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나는, 눈부신 주인공들의 청춘보다 한강에서 핫도그 트럭을 운영하는 70대 여성 원덕(김해숙)이 먼저 보인다. <스타트업>이 내가 사는 세상이었다면, 그는 아마 가장 먼저 격리되었거나,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었을 거다.
자정을 넘겨 야근을 마친 날, 24시간 설렁탕 가게에 갔다. 낯익은 종업원 아주머니가 “아가씨는 꼭 이 시간에만 오네” 하고 아는 척을 해주었다. 괜히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네. 회사 끝나면 이 시간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간호사인 조카가 몸이 아파 휴직했단 얘길 꺼내며, 밤에 일하면 몸 챙기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마친 택시 기사님이 껴들었다. “괜찮아. 청춘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아주머니가 웃으며 되받아쳤다. “아이고 그럼 뭐 나하고 아저씨도 청춘이에요?”
새벽 두 시, 식당을 나와 야근하며 얻은 만성 위통을 걱정하다가 24시간 약국이 있는 논현동까지 내달렸다. 역삼동 카드사에서 야간 콜센터 근무를 하는 친구는 이 시간에만 만날 수 있다. 어제 본 드라마, 오늘 있었던 일, 내일 만나고 싶은 사람. 주제가 일정하지 않은 말을 서로 위로하듯 나누다보니 새벽 네 시. 오전에 또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하는 친구를 첫차에 태워 보낸 후 나는 집에 갈 타이밍을 놓쳤다.
길에서 잠을 잘 순 없었다. 멀지 않은 신사동에 규모가 큰 여성 전용 사우나가 있다. 중년 여성 종업원 수십명이 바쁘게 수건을 수거하고, 국수와 삶은 계란을 팔고, 대걸레로 바닥을 닦으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면실에 들어가 쪽잠을 잤지만 알람이 없다는 초조함에 일찍 눈이 떠졌다. 씻고 회사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이었다. 제일 먼저 만난 건 여성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주차장, 로비, 엘리베이터, 비상계단, 화장실, 휴게실까지. 차에서 내려 내 책상까지 가는 동안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오전 일곱 시.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중장년 여성 노동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는 아침 뉴스를 들었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가 여성 고용 비중이 높은 직종들에 피해를 입혔다고 했고, 이는 청년 여성 자살률 증가와도 연관이 있다고 덧붙였다. 가구 구성원들의 돌봄 필요가 증가하며 유자녀 여성 노동자들이 타의로 근로를 포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는 전문가의 소견도 들렸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인지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슬펐다. 지난밤부터 아침까지 만난 여성들을 떠올리면 더 그랬다.
직장에선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형태로 일을 하고, 가정에선 돌봄이란 이중고에 시달리던 여성들이 이제 낭떠러지에서 질문한다. 나의 시간은 왜 당연한지, 나의 노동은 왜 이런 처우를 받아야 하는지, 나의 자리는 왜 항상 불안한 것인지. 역병은 여성들을 경제적 위기로 내몬 것이 아니라, 이제껏 우리 사회가 여성들의 노동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그 진실을 사람들 눈앞에 내밀어주었을 뿐이다. 이 고비를 지나면 우리에게도 다시 일어설 기회가 올까? 내가 딛고 있는 것이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모래밭이라 믿고 싶은 여성들은 오늘도 소리 없이 밤 근무를 한다.
November 26,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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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야간 근무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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