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힘을 다른 여성들에게 전해 줄 수 있도록 #임파워링_챌린지! 첫 번째 사연은 영랑씨가 친구 유정씨에게 받은 임파워링입니다. 영랑씨는 대학에서 유정씨를 만나 ‘친구’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됐습니다. 지금 수렁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을 든다면 친구에게 “힘들다”라고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때보다 훨씬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그래픽 | 이아름 areumlee@khan.kr
가족과 함께 있을 때 느꼈던 행복이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 그 불안전한 마음은 자존감을 무너뜨렸다. 친구를 만나 상처들은 조금씩 치유되었다. 그 시간을 기다려준 유정이.
대학 풍물 동아리의 선후배 사이였다. 두 학번 높은 유정이가 처음엔 어려웠다. 하지만 한 번에 멋진 선배라는 것은 알았다. 춤을 정말 잘 추는 선배였으니까. 학생들이 풍물과 농악을 배우고 전수받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방학 기간, 고창에서 두 달간 함께 생활하게 됐다. 많은 사람을 대하는 일. 감정 소모가 많아 불안정했던 나를 지탱해 주었던 유정과 친구가 됐다. 개학을 한 뒤 기숙사에 혼자 살면서 외로움이 많았던 나는 유정이의 방에 자주 가서 지내게 됐고 결국 함께 살기로 한다. 그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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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과 나는 떨어질 수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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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고 각자 취업을 준비하면서 지금은 서로 다른 도시에서 생활한다.
함께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에 대해,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 있는 이야기를 카톡으로 공유한다. 하지만 나는 유정이와 통화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전화로는 서로의 삶을 이야기한다. 요즘 주제는 가족. 문제가 없는 가족은 없을 테지만 여성들은 그 문제가 제도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딸은 가족 안에서 가장 약자가 된다. 유정이도, 나도 어느 가족의 딸이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면 누구든지 겪어봤을 일들이 있다. 대학에서 남자 선배들은 여자 신입생들의 외모를 평가하며 줄을 세운다. 동아리 선배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일도 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전공과목 교수가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참기만 했다. 선배들은 그래야 한다고 가르쳤다. 참을 수가 없어서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모두 무시했다. 학생들 대부분 모르는 척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을 곁에서 떠나보냈다. 우울증이 생기면서 술도 많이 마셨고, 아무에게도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지 못해 곪아 터지기 직전이었다.
유정씨(왼쪽)가 영랑씨의 고향인 부산에 놀러와 함께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경상도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군인이셨다. 아이들에게 호통을 쳐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이제 스물다섯인 나에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한다. 동생도 전형적인 경상도 지역의 남자다. 대학에 가면서 독립했다가 다시 본가에 돌아오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이 보인다. 그래서 사실 숨이 막힌다.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며 집안일도 혼자 책임지고 있다. 코로나19로 집에서 수업을 받는 동생은 하루 종일 집에 있어도 스스로 밥을 차려먹는 일이 없다. 어머니는 나에게만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낸다. 어깨 수술을 받아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나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상냥한 말투로 부모님을 대하면, 괜찮은 척하며 분위기를 맞춘다면, 우리 집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조용하게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것이 가짜 행복이라는 것을 안다.
유정이는 그것을 깨닫게 해준, 이렇게 느끼는 내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준 친구다. 그리고 항상 나를 지지해 준다.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모든 모녀가 그렇듯이 복잡하다. 어머니는 시험을 앞둔 나에게 동생이 원서 쓰는 것을 도와주라고 했다. 가족과 이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속상해하는 나에게 유정이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는 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믿는 것은 당연해. 넌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야.” 그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의 아들을 위한 발판이 되기는 싫다.
영랑씨가 찍어 준 유정씨의 표정이 맑다.
유정이는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 준다. 무슨 일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 주는 친구다. 상대의 마음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깊이 공감해 주면서 본인의 느낀 솔직한 말로 표현한다.
여성들의 우정을 폄하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아마 여성들이 결집하면 ‘체제’가 전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여성들의 우정보다 더 견고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공감 능력이 높은 존재들이 나누는 여성들의 우정은 단단하다. 친구는 가장 힘들 때 서로에게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존재다.
겉으로 보면 부드럽고 말랑해 보이는 유정이지만, 그는 누구보다 심지가 굳고 단단한 사람이다. 다른 친구가 유정이를 ‘외유내강의 이데아’라고 했다. 처음 본 사람도 편하게 말을 붙일 수 있는 성격. 하지만 내면이 단단해서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겉으로는 센 척을 하지만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다. 평가를 받을까 봐, 사소한 문제로 나를 판단해 약한 사람으로 볼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속으로는 곪아 터져도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먼저 물어주는,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해주는 유정이에게 마음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친구를 만난 것이 처음이다. 유정이를 만나고 ‘친구’에 대해 새롭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도 숨기지 못한다. 유정이가 알아채니까.
긍정적인 에너지로 똘똘 뭉쳐있는 유정이는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을 잘 발견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온전하게 말해주는 용기도 가졌다. 유정이를 보면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유정씨가 찍어 준 영랑씨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다른 여성들을 임파워링하게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신감 있고 용기 있다. 자연스럽게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미디어나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롤 모델이 여성은 남성보다 많지 않다. 소설에 나오는 영웅은 대부분이 남자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접해 왔던 그런 영웅들을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었다. 남성에 의해, 남성의 시각에서 완성된 소설. 그 속의 여성은 가부장적인 맥락에서 해석된 판타지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여성이다.
서로 숨기는 것도 없고,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는 사이. 서로를 온전히 믿는 사이. 앞으로도 유정이와 나의 관계는 지금과 같을 것이다.
나중에 취직하면 퇴근길에 편의점 앞에서 자연스럽게 친구와 만나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일과를 나누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꿈이다. 유정이와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일을 할 것이고 각자의 목표를 향해 가겠지만, 서로의 삶에 존재하는 그런 사이로.
취직을 하면 가장 먼저 유정이와 밥을 먹고 싶다. 내가 대접하는 식사. 유정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의 삶에는 ‘언니’라는 존재가 없었다. 서로 의지하는 친구 사이이지만 유정이는 나에겐 언니다. 그래서 잘 되면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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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이에게 나는 받은 게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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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힘이 되었던 말, 기뻤던 말이 있다.
“너랑 만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기뻐서 토할 거 같아!”
수술을 앞두고 눈앞은 캄캄하고 마음에는 답답함만 가득했던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 같던, 자존감은 바닥까지 떨어졌던 나에게 뭐든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던 한 마디였다.
죽을 것 같이 힘이 든 상황에 놓인 누군가를 살리는 데에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형체가 없는 말 한마디. 진심을 담아서 해한다면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든 상황에 처한 친구를 곁에 둔 사람이라면 그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해 주면 좋겠다. 유정이 나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수렁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면 친구에게 ‘나 너무 힘들어’라고 도움을 요청하면 좋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때보다는 훨씬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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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김보미 기자 bomi83@khan.kr
플랫팀이 #임파워링_챌린지를 시작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고, 무언가 깨닫게 해준 여성들은 멀리 있지 않아요. 일상의 소소한 임파워링, 인생의 대쪽같은 임파워링을 전해준 소중한 여성을 소개해주세요. 인터뷰에 선정된 분들께는 소정의 기념품을 드립니다. 자세한 내용보러 가기 📌클릭
June 15, 2020 at 11:56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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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우정보다 견고한 것은 없다[플랫]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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