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재계 14위 한보그룹의 부도를 신호탄으로 삼미·진로·기아·쌍방울·해태 그룹, 그리고 1999년 대우그룹 부도까지. 외환위기의 쓰나미는 30대 기업 중 17개를 집어삼켰다. 제일은행 직원들의 ‘눈물의 비디오’가 대변하듯 금융권도 초토화됐다. 은행 26곳 중 16곳이 퇴출됐다.
코로나19의 양상은 다르다. 외환위기는 사회 모든 곳을 강타했지만, 코로나는 적어도 아직까진, 핀셋으로 찍은 듯 약자에게만 가혹하다. 공무원은 물론 대기업도 일부 업종만 위기를 느낄 뿐 대규모 실직의 그림자는 아직 드리우지 않았다. 대신 영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등 힘없는 이들이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으며 쓸려나가고 있다. 지난달 직장갑질119의 설문조사 결과, 코로나19 이후 실직 경험 비율은 비정규직(26.3%)이 정규직(4%)의 6배 이상, 월 150만원 이하 저임금 노동자(25.8%)가 월소득 500만원 이상 고임금 노동자(2.5%)의 10배 이상 높았다.
사실 이 같은 현실은 외환위기 20년이 남긴 흔적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 줌의 좋은 직장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똘똘 뭉쳐 진입장벽을 더욱 높이 쌓았고, 위험하고 힘든 일자리는 장벽 밖으로 밀어냈다. 좋은 일자리 부족이 아니라, 나쁜 일자리가 급격히 많아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더 열심히, 악착같이 일할수록 병들고 가난해지고, 희망은커녕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의 쳇바퀴만 무한 반복하는,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노동신분이 생겼다. ‘무늬만 정규직’까지 합치면 현재 전체 노동자 절반 이상은 ‘비정규직’으로 추정(한국노동사회연구소)된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우리 사회 허리는 뭉텅 잘려나갔다. 고소득층의 소득은 늘고 저소득층의 소득은 더 줄었다. 외환위기 이전까진 75% 안팎을 유지하던 중산층 비율(통계청, 소득기준)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엔 60%대로, 몇 년 전부터는 50%대로 떨어졌다.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체감 중산층’은 2019년 34.6%(문화부, 한국인 의식조사)까지 줄었다. 구제금융 조건의 하나로 노동시장 유연화를 내걸었던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이젠 한국의 상위층 소득집중도가 특히 높다며 불평등 시정을 권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같은 양극화 가속화 속에서 맞닥뜨린 코로나19 위기는 각자도생의 삶이 사회를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 모두의 위태로움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 다음 위기가 닥치기 전 우리 사회는 뭘 해야 하나. 따로따로 모두 죽을 것인가(공멸), 함께 살 것인가(공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대 교수는 코로나 속 일자리를 ‘코로나 4계급’(원격근무가능·필수노동·무임금·잊혀진 계급)으로 나눴다. 사회를 이끄는 대부분이 원격근무가능 계급이겠지만, 위기상황에서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이들은 이름대로 ‘필수노동 계급(의사·간호사, 재택 간호·육아 노동자, 농장 노동자, 음식 배달(공급)자, 창고·운수 노동자, 경찰관·소방관·군인 등)’이다. 우리 모두 이들에게 ‘기생하며’ 살고 있다.
공생의 첫 단계는 나쁜 일자리를 없애고, 모든 일자리를 그럭저럭 할 만한 일로 만드는 것이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고된 일, 박한 대접에 장롱면허가 넘쳐나는 간호사, 코로나 와중에 호황을 맞고 있는 쿠팡 같은 물류·택배업체, 이주 노동자들이 못 들어와 일손 부족으로 아우성인 농촌과 중소기업 등을 모두 고용안정성과 임금, 복지 면에서 ‘괜찮은’ 일자리로 만들자는 얘기다. 이를 위한 비용은 그동안 이익을 챙긴 이들과 기업들, 때론 정부가 함께 내는 게 맞다. 원래부터 비정규직, 정규직에 선이 그어져 있던 게 아니다. 초격차도 우리가 최근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생사회로 가는 해법을 말하는 책 <배를 돌려라>(하승수 저)는 각종 불로소득 환수로 재원을 마련하자고 제안한다. 자본과 학력, 전관 등의 특혜 덕에 노력 이상으로 쉽게 벌어들인 돈을 부러워하지 말고, 따가운 시선을 보내 이를 나누도록 해야 한다. 최근 부동산 정책 논란 속에 고위공직자나 정치인들이 거주 목적 외의 다주택을 소유하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좋은 조짐이다. 그 뒤를 대표적인 불로소득 집단으로 꼽히는 국회의원들이 이어갔으면 한다. 입만 열면 민생과 서민을 말하는 21대 국회의원들에게 지난달 1063만원의 첫 월급이 지급됐다. 지난 4월 총선 직전 국민들의 고통을 분담하겠다며 정당마다 약속한 ‘세비 삭감’을 21대 국회에서도 쭉 이어간다면 ‘공생사회’의 희망이 조금 보일 것도 같다.
July 09,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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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쿠팡맨을 ‘괜찮은’ 일자리로!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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