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냐, 전국민 고용보험이냐
두 제도는 양립 가능한 것일까
“배고픈 사람이 빵집을 지나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보고 먹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무슨 자유가 있겠느냐.”(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비가 막 줄기차게 내리고 있는데 우산 쓴 사람한테까지 또 씌워드리기보다 장대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게 바로 전국민 고용보험제도다.”(6월 11일 박원순 서울시장)
지난 6월 3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정치의 목표는 물질적 자유의 극대화”라고 언급한 이후 기본소득이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동시에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시장이 논의를 주도하는 전국민 고용보험과 대안경쟁을 하는 모양새다.
통계청은 지난 6월 10일 지난달 실업자 수가 127만8000명이라고 밝혔다. 148만9000명을 기록한 1999년 6월 이후 가장 많다. 코로나19로 경제활동이 위축되면서 그 피해가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는 여론에 정치권은 기본소득이나 전국민 고용보험을 띄우며 화답했다. 다만 어떤 제도가 위기 극복에 더 효과적인지, 두 제도는 양립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전문가들은 두 제도의 현실성, 실현 방안을 두고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치권에서 두 제도 대안경쟁 양상
우선 두 제도는 기본 전제와 작동 방식이 다르다. 기본소득은 노동 활동을 전제로 하지 않고, 자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구성원 개인에게 정기적으로 균등하게 지급하는 소득이다. 완전한 기본소득을 시행하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다. 다만 기본소득의 요건 중 일부가 빠지고, 지급 수준도 소액인 ‘부분 기본소득’(기본소득으로 볼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이 코로나19 확산을 맞아 긴급재난지원금 등의 이름으로 지급되고 있다.
전국민 고용보험은 실업 상태가 된 사람에게 구직활동을 전제로 실업급여와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정규직·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자영업자 등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던 이들을 포괄하는 것이 목표다. 일하는 모두가 의무가입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고용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소득과 이윤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납부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보험료 납부가 어려울 정도의 취약계층의 경우 정부가 보험료를 절반 이상 지원하거나, 아예 정부 재정으로 실업급여를 제공하는 방식이 도입될 수 있다.
고용보험의 사각지대를 없애면 사회안전망의 보편성을 갖춘다는 점에서 기본소득의 설득력이 약해진다. 반대로 기본소득을 생계가 가능한 수준으로 매달 지급한다면 전국민 고용보험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 원칙적으로 두 정책이 공존하기 어려운 구조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본소득 대신 복지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재원을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실업급여 지출액은 총 9조3355억원, 1인당 실업급여 수급액은 최저 월 180만원에서 최대 198만원이다. 지난 2월 기준 고용보험 피보험자는 약 1382만 명으로 전체 취업자(2433만 명)의 절반을 조금 넘는다. 지금보다 예산을 두 배로 늘리면 전체 취업자로 고용보험을 확대하고 보험료 지원정책도 강화할 수 있다. 양 교수는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추가 비용인 9조3355억원을 기본소득으로 5200만 명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월 1만4900원이 된다. 사각지대는 해소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액수”라고 말했다.
양 교수는 198만원인 실업급여 최고액을 300만원까지 인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쌍용차 해고자들처럼 생계의 어려움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없도록 최저임금 수준인 실업급여를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기본소득이 들어올 경우 사회보장 강화가 어려워진다는 것이 양 교수의 입장이다.
기본소득과 복지국가의 원리가 상충한다는 지적도 했다. 양 교수는 “무상급식이 소득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급식을 제공하는 것이듯 실업자라면 누구나 조건 없이 실업급여를 받게 하는 것이 보편복지라고 할 수 있다”며 “상부상조와 사회적 연대의 정신에 입각한 복지국가 원리에 비춰주면 기본소득은 보편복지가 아닌 무차별 지급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복지국가는 단순히 가난하다고 주는 게 아니라 위험(실직·질병)과 욕구(육아·돌봄)로 소득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장하는 것”이라면서 “복지급여는 저소득 빈곤 가구나 실업자·육아휴직자·은퇴자 등 소득이 없는 사람에게 가기 때문에 소득 재분배 효과도 더 크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을 소득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준 후 고소득자의 세금을 높여 환수하더라도, 소득이 끊기거나 격감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지급하는 복지지출의 재분배 효과를 넘어설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 달 기본소득을 1인당 200만원씩 준다면 1248조원으로 2000조원 수준인 국민총생산(GDP)의 62%에 달한다. 사각지대를 해소하면 실효성이 없고, 실효성을 키우려고 지급액을 늘리면 예산 확보가 불가능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상이 제주대 교수(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사각지대가 넓고 각종 급여의 보장수준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질적 보편주의를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보편적 사회서비스를 확충하고 청년 고용지원 등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강화하는데 재원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은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안 공론화하는 계기로 긍정”
두 제도를 대결구도로 볼 필요가 없다는 입장도 있다.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를 우선에 두고, 보조적으로 부분 기본소득을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양립 가능성은 기본소득을 어느 수준에서 결정하느냐에 달린 문제”라며 “아동수당과 기초연금, 청년수당 등 복지국가의 보편적 수당과 같은 성격의 부분 기본소득이라면 전국민 사회보험과 양립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 교수는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인 자유를 보장할 정도의 높은 수준, 예를 들어 250만원 정도를 지급한다면 양립할 수 없다”며 “현재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미래통합당 등 정치권에서 나오는 논의를 보면 그런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연간 1인당 20만~30만원 수준은 기본소득이라기보다 긴급재난지원금 성격에 가깝다”며 “당장은 고용보험 확충이 제도적으로 더 중요하지만, 위기상황에선 아주 낮은 수준에서 기본소득을 병행할 필요성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다만 그 사용처와 사용기간을 정해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장기적으로 전국민 고용보험과 실업부조가 완성되면 기본소득의 첫 단계로 연결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업부조는 고용보험기금이 아닌 일반 재정으로 고용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구직촉진수당을 주고, 구직활동도 지원하는 제도이다. ‘국민취업지원제도’로 오는 7월부터 시행되는데 실업부조가 그 적용 대상을 확대되면 마찬가지로 일반 재정을 쓰는 기본소득과 성격상 겹치는 부분이 커진다는 뜻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이 소득과 이윤에 기반하는 방식(조세 방식으로도 불림)으로 도입될 경우 고용유연성 확대를 막는 효과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지금처럼 기업이 노동자 몇 명을 고용했는지가 아니라 이윤을 얼마만큼 내느냐에 따라 고용기금에 기여하도록 바뀌는 것”이라면서 “노동자를 자꾸 외주화해 인건비를 줄여 이윤을 올리는 기업도 충분히 책임을 지게 하는 방식이라 기업의 이윤 동기에 따른 과도한 유연성을 막는 하나의 장치가 될 것이다”고 전망했다. 이윤을 높이기 위해 고용을 줄이면 그만큼 일정정도 고용보험료도 늘어나는 구조라 고용을 줄일 유인이 작아진다는 의미이다.
윤홍식·정세은 교수는 두 제도를 둘러싼 논쟁을 환영했다.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사회보장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대안을 찾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코코라19를 계기로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가 위기에 대응하기 부적절하다는 게 드러났다”면서 “사회보험의 사각지대가 많고, 특수고용직이나 소득을 상실한 사람을 지원할 수단이 마땅히 없다는 취약성이 드러나 그 대안으로 정부·여권은 전국민 고용보험 카드를 꺼냈고, 통합당은 부분 기본소득이라는 프레임을 들고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이런 한국 사회의 고민이 증세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건강보험은 내는 돈이 아깝지 않다고 국민 모두가 확인했을 정도로 코로나19로 복지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굉장히 높아졌다”며 “이번 기회에 사회보장제도가 단순한 돈 낭비가 아니라 국민 안전과 생활의 방패가 된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 확대 여부를 국민에게 전향적으로 물어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더 과감하고 담대하게 증세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은 사회개혁·증세 이끌 제도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학자들도 우선 고용보험 적용을 확대하고, 추후 기본소득으로 나아가는 방식을 제안했다. 김교성 중앙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정치인들의 정쟁 도구로 활용되는 것 같은 우려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몽상가들의 상상 정도로 취급됐던 내용이 구체적인 대안으로 거론되는 건 반가운 일”이라며 “종국에는 기본소득을 지지하지만 조세 방식의 전국민 고용보험이 실업 안전망으로 작용하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고용보험에 대한 논의가 확장되면 이를 발판 삼아 조세에 기반을 둔 소득수당 제도가 발전하고 그 이후 기본소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하기 때문이다. 정세은 교수의 생각과 비슷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기본소득을 복지정책이 아니라 경제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는 우파를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라고 해석했다. 김 교수는 “지금 시대는 복지정책과 경제정책이 구분되지 않는다”면서 “복지는 모두 경제에 도움이 되는 생산적 요소를 갖고 있어서 성장과 복지는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강남훈 한신대 경제학과 교수(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는 고용보험부터 먼저 시작하되 기본소득은 국민의 합의로 증세를 한 뒤 추진하자는 입장이다. 강 교수는 “고용보험은 보험이라는 점에서 재원의 상당 부분은 가입자들의 보험료로 충당하기 때문에 기본소득보다 예산이 적게 든다”며 “전국민 고용보험은 국민적 합의가 거의 이뤄졌기 때문에 빨리 추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국민 고용보험이 빨리 시행될수록 기본소득의 필요성도 공감대를 얻기 쉽다고 주장했다. 강 교수는 “전체 소득자 중에서 약 1100만명 정도는 일년 소득이 1000만원이 안 된다. 고용보험으로 절반 정도를 받아도 생활보장이 어렵다는 점에서 고용보험에 추가해서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점을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논쟁할 시간도 없다”며 “새 국회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전국민 고용보험과 기본소득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쪽은 기본소득을 복지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개혁, 증세의 공감대를 이끌어낼 제도로 주목하고 있다. 김 교수는 “국가로부터 받는 복지급여에 대한 경험치가 쌓여야 증세에 대한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서 “기본소득을 토지와 정보를 비롯한 사회가 일군 ‘공유부’에 대한 배당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남훈 교수는 금액의 충분성 여부가 기본소득의 중요한 조건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기본소득을 단순한 재분배정책이 아니라 사회적·생태적 전환을 이룰 수 있는 이행전략으로 강조했다. 강 교수는 “기본소득의 근본 원리에는 토지·환경·정보 등 우리 모두의 공유자산이 있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을 전국민이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이라면서 “가령 이재명 경기지사가 제안한 국토보유세를 재원으로 1년에 30만~60만원 정도의 토지배당을 하면 충분치는 않지만 토지가 우리 모두의 공유자산이라는 걸 국민 모두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고용없는 성장이 더 고착화되고, 기후위기를 맞을 미래에 기본소득이 국가와 시민이 맺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국토보유세는 이재명 지사가 지난 201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내건 공약이다. 국토보유세를 신설해 현재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선진국의 절반 수준인 0.5%까지 올리면 연간 15조5000억원의 세수를 얻게 되는데 이를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약 3만원)으로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강 교수는 토지배당을 활용한 기본소득은 금액이 작아 복지효과가 크지 않지만 한국의 자산 불평등의 가장 큰 원인이 된 부동산 투기를 없애는 효과는 크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탄소세 역시 기후변화를 막고 지구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강 교수는 “탄소세는 기본소득(탄소배당) 없이는 정치적 저항 때문에 도입이 불가능하다”면서 “탄소세를 거둬 이를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증세에 대한 저항 없이 탄소세를 도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June 14, 2020 at 06:42AM
https://ift.tt/3d0kUJ1
기본소득과 전국민 고용보험, 양립할 수 있을까 - 경향신문
https://ift.tt/2Yts9ni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기본소득과 전국민 고용보험, 양립할 수 있을까 - 경향신문"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