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이란 역에 내렸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운명인 양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내린 곳이 종착역인지 환승역인지 모르겠다. 종착역이라면 출구가 있어야 할 테고, 환승역이라면 막차가 와야 할 텐데. 출구는 찾을 수 없고,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간 갈등이 검찰개혁이란 이름으로 전개된 지 1년이 됐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제 다른 세상이 펼쳐질까. 불행히도 그럴 것 같진 않다. 이날부터 윤 총장 징계 절차가 시작됐다. 윤 총장이 징계를 받든 피하든 검찰개혁은 이미 궤도를 이탈했다. 검찰개혁이 검찰 굴복으로, 가장 위험한 권력인 검찰의 수장이 순교자로 둔갑했다. 남은 건 추 장관과 윤 총장의 승패뿐이다. 카를 마르크스가 헤겔의 언급에 덧붙인 말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가 떠오른다. 화해하기 힘든 격렬한 ‘신들의 전쟁’은 지금도 비극과 희극을 반복하며 질주하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국가가 시민들의 공적 감정을 키우지 않는 것이 비극의 요인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입하면 ‘추·윤 싸움’은 처음부터 비극이었다. 추 장관은 기꺼이 애국할 준비가 돼 있는 시민들을 검찰개혁 대전의 관찰자로 추락시켰다. 그렇다고 싸움의 동기를 제대로 알려준 것도 아니다. 선출된 권력이라 해도 헌법적 견제 장치를 굴복시키려 한다는 게 요즘 민심이다. 여권 연루 사건의 수사진 교체, 윤 총장 징계 과정이 이를 입증한다.
윤 총장은 살아 있는 권력 견제라는 깃발만 들고 민주정치의 기본인 문민통제를 거부했다. 민주화 이후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군림했음에도 스스로 살아 있는 권력이라는 사실을 성찰하지 않았다. 이 싸움은 그래서 권력 투쟁일 뿐 공적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저잣거리에선 검찰개혁이 우스갯소리로 회자된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지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검찰개혁하느라 시간을 못 맞췄다”고 했다는 것 아닌가. 한 여권 인사는 “호랑이 잡으러 가는 포수가 동네 입구부터 총을 쏴대면 호랑이는 고사하고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지”라고 냉소를 보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개혁 철학은 검찰개혁의 비극을 역설한다. 루스벨트는 대공황 시기, 뉴딜 정책 성공을 위해 공적 감정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자연재해가 아니면 복지정책에 우호적이지 않은 시민들을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사진가들에게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포착하라고 지시했다. 실업급여와 빵을 받으려 줄지어 선 사람들의 사진이 언론에 실렸고 국회 보고서에도 포함됐다. 시민들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나도 겪을 수 있다고 느끼게 됐다.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성공했다.
죽기 살기로 겨룬 싸움에서 희극이 있겠나 싶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어느 선까지 대충 하다 접을 것 같지 않다. 그간 법복에 가려졌던 검찰 내부 얘기가 드러나고 있다. 여의도에서 남성 권력자들과 부대끼며 이들의 감정 버튼을 누르는 방법을 아는 추 장관도 타협할리 없다. 게다가 각자 대의명분을 품고 있으니 검찰개혁은 ‘적당히’란 불가능하다.
누스바움은 인간의 본성을 한껏 즐길 수 있는 것이 희극적 관람의 특성이라고 했다. 취약한 인간의 한계가 살아 있음의 표지임을 일깨운다고 확신했다. 사생결단식 ‘추·윤 싸움’은 이런 측면에선 희극이라 할 만하다.
코로나19로 모두들 외로운 시절을 나고 있다. 누군가는 가난해서 외롭고, 또 누군가는 세상이 불평등해서 외롭다. 얼마 전 한 후원단체가 보낸 연말 선물을 받았다. 가로·세로 15㎝짜리 ‘한평 달력’이다. 1년치 12장을 배열하면 가로·세로 각각 180㎝(3.24㎡), 채 한평이 안 된다. 1인 최소 주거면적 4.2평(14㎡)보다 작다. 한평이 부동산 자산 단위가 아니라 삶의 터전인 사람들은 이 달력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2년 전 12월10일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김용균씨는 안전조치 하나 없는 작업장에서 컨베이어벨트에 깔려 사망했다. 그의 2주기가 지났지만 노동자들의 귀한 목숨은 아직 국회에 갇혀 있다. 김씨가 지켜보고 있다면 온통 검찰개혁밖에 없는 세상 때문에 지독하게 외로울 것 같다. 검찰개혁으로 민생개혁이 가려졌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추·윤 싸움’ 너머에 한평 달력이 꿈꾸는 삶, 세상의 모든 아픔을 앓는 정치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처럼 권력투쟁뿐인 싸움이라면 더욱 간절해진다.
December 11, 2020 at 0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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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추·윤 싸움’ 그 비극적 관람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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